내가 알고 지내던 부부가 있었다. 그들은 나보다 조금 어린 나이였지만,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모습만큼은 훨씬 성숙해 보였다. 언제나 조용히 서로를 배려하며, 자연스럽고 담백한 태도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나뿐 아니라 그들을 아는 사람 누구에게나 깊은 인상을 남기곤 했다.
그들 사이에는 부러울 만큼 자연스럽고 조용한 행복이 흐르고 있었다. 겉으로 과시하지 않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는 것 같았다. 마치 오래된 클래식 음악처럼, 감정을 과장하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이 잔잔한 울림을 주는 사람들. 그들의 삶에서 느껴지는 평화로운 에너지는 마치 바람 한 점 없는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인상을 남겼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문득 장난스러운 호기심이 일어났다. 혹시라도 그 고요함이 내가 던지는 짓궂은 질문 하나로 흔들릴 수 있을까? 작은 파문을 일으켜 보고 싶은 유혹. 하지만 언제나 그들은 조용한 미소로 답했다. 따뜻하고 은은하게 번지는 웃음. 모든 농담과 날카로운 말조차 힘을 잃게 만드는 그 미소는, 마치 폭풍우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배처럼 유연하면서도 견고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하며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신뢰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평온함을 지니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평온함의 비밀
우리 사회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대한 회의적인 시선을 자주 갖는다. 겉이 화려할수록 내면이 비어 있을 수 있다는 말, 우리가 종종 듣는 경구다. 그래서였을까. 나 역시 처음엔 그 평온함이 진짜일까, 아니면 잘 훈련된 가면일까 의심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점점 그들의 삶에 스며든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보여주기 위한 연기를 하지 않았다. 불필요하게 말이 많지도, 자신을 가리려 하지도 않았다. 차분한 걸음과 낮은 목소리, 상대방의 눈을 바라보는 진지한 태도, 모든 것이 진짜였다.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마치 우리가 종종 잊고 지내는 ‘시간의 밀도’를 상기시켰다. 욕망하거나 흘려보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평온함은 어떤 사건을 극복한 후의 침묵도, 어떤 이상을 추구한 결과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일상의 선택이었고 오랜 시간 쌓아온 삶의 방식이었다.
조용한 미소 속에 담긴 것
그들의 조용한 미소를 보며 나는 종종 생각했다. 저 미소 속엔 무엇이 담겨 있을까? 단순한 배려일까, 아니면 깊은 내면의 평화일까?
물론 그들에게 직접 묻지는 못했다. 하지만 내가 짐작하기로는, 그것은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중 속에서 피어난 미소였다. 작은 오해에도 흔들리는 관계 속에서, 그들은 서로의 말 너머를 읽고, 감정의 뉘앙스를 섬세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상대를 믿기에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어쩌면 상처조차도 사랑의 일부로 받아들였던 게 아닐까.
더 깊게 들여다보면, 그들의 미소는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실수나 비판 앞에서도 당황하거나 방어적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가벼운 공격을 유쾌한 흐름 속으로 흡수하는 방식. 그것은 감정이 아닌 의도를 보는 지혜, 말의 결과가 아닌 순간의 관계를 믿는 신념이었다.
그들의 조용한 미소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그것은 소리 없는 대화였고, 서로에게 보내는 무언의 응답이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배우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깊이를 나에게 선물해주었다.
부부라는 작은 세상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면서 완전히 평온할 수는 없다.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없고, 서로 다른 시간대에서 피곤을 느끼며 때로는 다정함 대신 침묵으로 하루를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함께 만든 작은 세계는 외부의 소음과 비교되지 않을 만큼 단단했다. 그들 사이엔 자연스러운 규칙이 있는 듯했다. 상처주는 말은 감정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설명으로 바꾸고, 서로의 마음이 닫히기 전에 손을 내미는 방식. 서로 다른 목소리와 감정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신뢰를 지킨다는, 묵직한 약속이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건 계약이 아니라, 오랜 대화와 삶의 반복 속에서 조심스럽게 다듬어진 관계의 결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부부’란 단순히 동반자 이상의 의미였다. 그것은 가장 가까운 마음의 돌봄이자, 어쩌면 세상에서 유일하게 온전히 쉴 수 있는 정서적 안식처였을 것이다.
내면의 평화가 만드는 관계의 안정감
생각해보면, 그들 사이의 평온함은 단지 서로 좋은 관계를 유지해서가 아니라, 각자가 먼저 자신과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감정을 표현할 줄 알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상대에게 감정을 투사하기보다는 자기 내면의 진실을 먼저 들여다보는 사람들.
그들은 감정을 숨기지도 포장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감정을 어떻게 꺼내야 서로가 더 편안해질지를 알고 있었고, 그 방법을 함께 연습하면서 살아온 듯했다. 자기 감정을 인정하고, 때론 이를 거리를 두고 바라보며 더 깊은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그들의 평온함의 원천이었다.
잔잔한 울림, 나의 다짐
나는 여전히 가끔 그 부부를 떠올린다. 그들의 조용한 미소와 말없이 나누던 눈빛, 복잡한 말 없이도 충분했던 공기의 흐름. 과연 나도 그런 삶이 가능할까 자문하게 된다.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평화를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가는 인간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인간을 대하는 방식, 그리고 나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이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단단해진다면, 언젠간 나 역시 그들처럼 흔들림 없는 미소를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부부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편안해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들 속에 담긴 조용한 행복과 단단한 신뢰가 내게도 잔잔히 전달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바람 없이 퍼져나가는 물결처럼, 그들의 존재는 나에게도 잊고 있던 평화를 상기시켜주었다.
인생은 결코 조용하지 않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나도 그들처럼 내 마음속에 고요한 호수 하나쯤은 품고 살아가고 싶다. 결국 진정한 평온함이란 삶의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용기, 그리고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존재와의 만남 속에서 싹트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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